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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게시물에서 포에니 전쟁에 대해서 다루었다.

요약하자면,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치러서 로마가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큰 빚을 지게 되고, 전쟁을 허락 없이 일으킬 수 없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로마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없애버릴 구실만 계속 찾고있었다. 

그 구실은 머지않아 나타났는데, '누미디아' 라는 나라가 툭하면 카르타고를 못살게 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대응했다가 로마에게 책잡혀버린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불타 사라졌다. 로마는 카르타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마케도니아,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도 쏙쏙 흡수를 했다. 

이 후

로마는 영토와 재물을 얻었으나, 로마인들은 사치에 빠졌다. 나라는 부패해지고 농민들은 더 가난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호민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형제가 개혁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에의해 살해되는 일도 생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 세 명은 같이 로마를 나누어 관리하기로 했는데 이를 '제 1차 삼두정치' 라고 부른다. 크라수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만 처리하면 본인이 1인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오면 살해하려고 시도하지만 갈리아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이를 눈치채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온다. 폼페이우스는 겁에 질려 도망갔다가 이집트에서 죽고, 카이사르가 최고 권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종신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평민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고 (일자리 창출, 토지와 식량 분배, 지나친 사치 금지, 더 많은 식민지 확보 등) 평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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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 혁명!

배경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이 두가지 중 미국의 독립 혁명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American Independence War, The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미국의 독립혁명, 독립 전쟁은 현재 미국 땅에 살고있던 13개의 식민지와 영국사이의 전쟁이다. 

 

우선, 영국과 영국의 이 식민지의 관계부터 이해해야한다. 이들간의 관계는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한국과 일본사이의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가난하거나 죄수들을 상대로 새로운 희망의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모았고, 미국으로 이들을 보냈다. 그들이 미국땅에 정착을 한 것이었다. 인디언들도 이들의 정착을 도왔고, 유럽 각지에서도 가난 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모여들기도 했다. 이들은 자치의 권리도 누렸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 후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전쟁에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식민지에 세금을 높게 책정해서 그 손실을 메우려는 정책을 세운다. 이것은 미국땅에 살고있던 그들의 식민지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애초에 식민지 지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던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큰 사람들이 많았기에 영국의 위와 같은 정책은 사람들을 분노하게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는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 중 차(tea)에 세금을 메기는 것에 분노해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보스턴 차 사건이기도 하다. 

Boston tea party

이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일어났던 전쟁으로 결국 보스턴에서 독립전쟁이 시작하여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미국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으로 삼는다) 미국의 승리로, 1783년 파리조약에서 미국은 독립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의 헌법이 규정되었다.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그리고,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가 필요해진 미국은 1789년에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이로써 조지 워싱턴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독립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에 의한 전쟁이었으나, 근대적 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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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청나라가 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청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라 광저우 항만 해외무역을 위해 개방한 상태였다. 

 

무역을하면서, 영국은 , 도자기 등을 수입했고 영국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마시는 문화가 발전하여 서민들가지도 차를 많이 소비하게 되었고, 차를 수입하는 양이 커졌다. 반면 중국은 면직물,시계,망원경 등을 수입했다. 이는 작물같은 것이 아니라서 중국이 영국으로 차를 수출하는 만큼 많지 않았다. 자연스레 영국의 무역적자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인들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위해서 생각해낸 것이 아편무역이었다. 

 

영국은 인도(영국의 식민지)에서 아편을 만들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법으로 삼각무역을 정립했다. 그리고 중국의 하층민에게 아편을 팔았고, 그들의 아편 소비는 엄청났다. 사실 청나라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있었으나 영국은 밀수입의 방법으로 청나라에 들여왔고, 아편이 청나라에서 모든 계층으로 퍼졌다.

영국은 국가의 유출을 피했고, 청나라는 거래를 하며 은으로 결제를 했어서, 청나라의 보유량이 급감하여 은값이 폭등하고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에 청나라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웠다. 외국상인들의 아편을 붙태워버리는 등의 아편 단속을 철저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인들(마약상)들을 추방하였다. 이에 반발한 영국상인들은 이를 영국정부에 알렸고 이것이 1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다. 

 

1840, 영국은 공격을 시작했다.

 

1842, 결국 청나라는 대패하였고, 영국에 굴복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배상금 600 달러를 지불하고 홍콩 상하이 광저우 등의 항구를 개방하기로 하였다. 

조약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홍콩지역을 영국에게 내어줄 것, 5개 항구를 개방할 것, 청은 영국에 배상금을 지불할 것, 최혜국 대우" 등이 있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 실렸던 아편전쟁을 묘사하는 일러스트

이는 아편 무역이 영국의 권리가 된 것과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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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고 있는 책은 통세계사(김상훈 지음) 이다.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큰흐름으로 이해하기에 좋은 책이다. 중요한 부분들이나 흥미있는 부분들만 골라서 공부할 겸 포스팅으로 기록해두기로 했다. 

2권중에 첫번째 권을 읽는 중!!

 

오늘 정리하려는 내용은 포스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트로이 전쟁 이후의내용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 미케네의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쳤고, 트로이의 승리로 보였으나 목마덕분에 그리스가 승리하고 트로이는 멸망한다. 이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상상력이라고들 생각했는데 증거가 발견되면서 실제 사건이라는게 밝혀졌다. 

 

하지만 전쟁 이후 엄청난 화재가 그리스 본토를 휩쓸었고 불길은 아프리카까지 번질만큼 셌다. 이 화재로 인해 미케네문명의 유적은 대부분 사라졌다고 추정된다. (미케네 문명: 그리스 본토에서 생긴 문명으로 크레타문명을 장악하고 그리스를 주도했었다) 게다가 화재의 발생으로 역사의 유물들이 다 타버려서 특정 기간동안 그리스의 역사가 어땠는지 전해지는 것이 없다.이를 '그리스 암흑시대' 라고 함.

출처- https://www.slideshare.net/srinaldipds/maps-ancient-and-medieval-history

이후 그리스에는 도시국가 폴리스들이 등장했고, 그 폴리스들도 식민 도시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폴리스는 평등한 나라의 이미지지만 그리스인들(헬레네스) 과 식민백성들을 차별대우하는 건 있었다. 

 

그러다가 그리스의 주도권은 그 중에 군국주의 국가 스파르타에게 넘어간다. (리쿠르고스 체제에 의해 아이들은 전사로 혹독하게 전사로 키워지고 노예들은 농사짓고 여자들도 훈련을 받았다.) 스파르타는 주변 폴리스들을 장악하고 펠리폰네소스 반도를 점령했다.

아테네에서는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가 아테네 전체를 통일한 다음 왕정을 없앴다. 이후 정복하려는 사람이 나타났을때도 시민들이 성공했고 이는 시민들의 위상을 높였다. 귀족들은 시민을위해 아테네 최초의 법전 '드라콘법'을 만들었다. 

 

한편....

그리스 인근 이탈리아반도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이 아펜닌 산맥을 따라 아펜닌 문명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이들은 로마의 조상은 아니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로마인들에의해 쫒겨나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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