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지난 게시물에서 포에니 전쟁에 대해서 다루었다.

요약하자면, 로마와 카르타고가 전쟁을 치러서 로마가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큰 빚을 지게 되고, 전쟁을 허락 없이 일으킬 수 없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로마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없애버릴 구실만 계속 찾고있었다. 

그 구실은 머지않아 나타났는데, '누미디아' 라는 나라가 툭하면 카르타고를 못살게 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대응했다가 로마에게 책잡혀버린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불타 사라졌다. 로마는 카르타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마케도니아,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도 쏙쏙 흡수를 했다. 

이 후

로마는 영토와 재물을 얻었으나, 로마인들은 사치에 빠졌다. 나라는 부패해지고 농민들은 더 가난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호민관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형제가 개혁을 추진했으나 귀족들에의해 살해되는 일도 생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이 세 명은 같이 로마를 나누어 관리하기로 했는데 이를 '제 1차 삼두정치' 라고 부른다. 크라수스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만 처리하면 본인이 1인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오면 살해하려고 시도하지만 갈리아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이를 눈치채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온다. 폼페이우스는 겁에 질려 도망갔다가 이집트에서 죽고, 카이사르가 최고 권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종신 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는 평민을 위한 개혁을 시도했고 (일자리 창출, 토지와 식량 분배, 지나친 사치 금지, 더 많은 식민지 확보 등) 평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반응형
반응형

이전 게시물에서는 미국의 독립혁명에 대해서 다루었다.

링크: https://moomeobal.tistory.com/89

 

[민주주의 혁명] (1) 미국의 독립 혁명, 미국 독립 전쟁 (배경 지식용 요약 정리)

양대 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 혁명! 배경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이 두가지 중 미국의 독립 혁명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moomeobal.tistory.com

 

미국의 독립전쟁 이후, 프랑스의 시민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우선 프랑스의 당시 사회에 대해서 이해가 먼저 필요한데, 루이 14세,15세가 만들어놓은 국채와 더불어, 영국을 견제하고자 미국의 독립전쟁을 도운 이후로 프랑스의 재정은 심각한 상태였다. 국고는 바닥을 보였으나 이 나라의 계급사회는 돈 많은 귀족들에게 면세혜택을 주었고 그들의 사치를 막을 수 없었다. 이를 메우기 위해서 나라는 평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과세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막상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본인들 밥그릇만 챙기기에 급급한 귀족들이 하는 정치는 사태를 심각하게 몰고 갔다. 이 시기의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사회계약설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프랑스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념의 기초를 다지도록 해주었다. 

덧붙여서 일부 부르주아들은 귀족들보다도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으로 귀족계급에 편입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귀족이 된 부르주아들은 본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더 악독하게 정치에 관여해왔고 이는 평민들의 숨통을 죄었다. 기득권층이 시민들을 더 궁지로 몰며, 또 권리 독점을 위해서 귀족이 되고자 하는 부르주아들을 제지하기에 나섰다. 

위와같은 체제를 구체제,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심화된 재정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정책이 제시되었으나

당연히...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삼부회가 열리게 되지만 투표방식을 두고 논란을 벌이다 결렬되고 만다.

 

 

이후 시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요구하며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새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하는데, 국왕은 이를 무력으로 해체시키고자 한다.

이에 국민 의회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7월 14일에 습격하게되고,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다.

 

루이 16세는 이 사건으로 국정을 국민의회에 맡기게 되고, 국민의회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이 인권 선언은 구체제가 끝났음을, 그리고 새로운 시민 사회의 지향을 나타낸다. 

 

-----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여기서 끝나지 얂는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된다. 절대왕권의 상징과도 같던 프랑스 왕권이 무너지자, 다른 국가들의 왕들도 충격을 받는다. 프랑스를 견제하려는 외부로의 공격과, 내부에서도 과격해지는 혁명에 반기를 들자 프랑스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진다. 로베스 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고, 이 공포정치에 반기를 든 자들이 그를 독재자로 몰아서 처형시킨다. 이 후 총재정부가 들어오고, 총재정부가 무능하다고 밀어낸 후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시작된다.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대 혁명은 국가의 주인이 국인이 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이 널리 확산된다.

 

반응형
반응형

 

양대 민주주의 혁명으로 불리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 혁명!

배경지식으로 알아야 하는 부분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이 두가지 중 미국의 독립 혁명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다. 

 

<American Independence War, The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미국의 독립혁명, 독립 전쟁은 현재 미국 땅에 살고있던 13개의 식민지와 영국사이의 전쟁이다. 

 

우선, 영국과 영국의 이 식민지의 관계부터 이해해야한다. 이들간의 관계는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한국과 일본사이의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가난하거나 죄수들을 상대로 새로운 희망의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모았고, 미국으로 이들을 보냈다. 그들이 미국땅에 정착을 한 것이었다. 인디언들도 이들의 정착을 도왔고, 유럽 각지에서도 가난 등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모여들기도 했다. 이들은 자치의 권리도 누렸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 후 재정적으로 타격을 입는다. 전쟁에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식민지에 세금을 높게 책정해서 그 손실을 메우려는 정책을 세운다. 이것은 미국땅에 살고있던 그들의 식민지의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애초에 식민지 지역으로의 이주를 결심했던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큰 사람들이 많았기에 영국의 위와 같은 정책은 사람들을 분노하게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는 불씨를 심어주었다. 그 중 차(tea)에 세금을 메기는 것에 분노해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 보스턴 차 사건이기도 하다. 

Boston tea party

이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일어났던 전쟁으로 결국 보스턴에서 독립전쟁이 시작하여 1776년 7월 4일에는 독립선언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미국은 이 날을 독립 기념일으로 삼는다) 미국의 승리로, 1783년 파리조약에서 미국은 독립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전쟁 이후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의 헌법이 규정되었다. 

 

Declaration of Independence

 

그리고,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가 필요해진 미국은 1789년에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이로써 조지 워싱턴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 독립 전쟁은 경제적인 이유에 의한 전쟁이었으나, 근대적 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반응형
반응형

남북전쟁은 미국의 남부의 주들과 북부의 주들이 서로 대치했던, 많은 군인들과 시민들이 죽어난 전쟁이다. 미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획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전쟁을 훑고나면 아직도 그들에게 잔재하는 사상들이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땅이 굉장히 크기도 하고, 각각의 주들이 모여서 미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있는데, 크게 동부, 서부 그리고 남부로 나뉜다고 본다. 동부 서부 남부의 자연환경이나 기후 또한 다르지만, 지역에 따른 성향 또한 많이 다르다. 이 전쟁은 대표적으로 그 성향을 극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미국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유명한 Civil War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남북전쟁에서의 북부지역은 주로 동부를 의미하는데, 수도가 위치하고있어 많은 것이 집중되어있는 곳이 동부지역이기 때문이다.)

-

 

당시 북부는, 지금도 그렇듯 경제의 성장이 빠르고 산업화가 이루어지며 경제가 발전하고있었다. 반면 남부는 농업과, 많은 가정에서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북부지역은 도시화로 인해 그 당시에 존재하던 노예의 필요성이 점점 줄고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농업으로 먹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큰 농장에서는 노예를 대거 부리며 1차산업에 종사했고, 한 가정에서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으면 부유한 가정으로 여겨졌다. 백인 사회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가 바로 노예였다. 

이러한 지역적 차이는 "노예제도 폐지" 라는 사항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을 가져왔다. 

북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나왔는데, 여기에는 두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보고있다. 첫째, 인간의 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며 노예제도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강대국들이 노예제를 폐지하며 미국도 그 흐름에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둘째, 인간권리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북부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며 노동이 많이 필요해지자, 남부에 집중되어 있는 노예들을 해방하여 노동력을 순환시키자는 취지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북부의 입장에, 노예제에 많이 의지하고 있는 남부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대했고, 남북이 이 사안에 대립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슬아슬하게 이를 중재하며 버텼다.

그러다가 대통령 선거에서 노예폐지를 옹호하는 입장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이에 남부는 질겁하며 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7개의 주들이 미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 연합" 을 결성하게된다. 그리고 그들의 대통령으로 제퍼슨 데이비스를 올려놓는다. 미연방정부는 다시 돌아오라고 남부 연합을 위협하고, 그렇게 남과 북이 대치를 하다가 남부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해 남북전쟁이 시작된다. 

 

남부 연합은 "아메리카 연합국" 이라고도 하고 이 후 4개의 주가 더 추가되면서 국기가 이렇게 바뀐다. 이 국기들을 현재 사용하는 것은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조심스러워야 한다. 아무것도 모른채 사용해서 오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 전쟁의 과정은 다른 전쟁들처럼 많은 과정이 있었는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남쪽이 우세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북쪽이 승리하게된다. 

결과적으로 북부가 이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남부 연맹과 노예제도는 사실상 끝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있었으나, 이후 정부의 재건 노력으로 미국의 연방정부의 힘은 더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미국이 열강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노예들의 인권 문제는 사실상 여기서 끝이 나지 않지만, 노예제도는 폐지가 되었다. 

 

 

 경제가 중심인 동부는 뉴욕 워싱턴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부자들과 사업가들을 탄생시키고, 남부에서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각하다. 텍사스의 총기사건이 발생한지 한달도 지나지 않았고 범행을 저지른 사람은 백인 우월주의의 20대 청년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이 내전은 200년 채 되지않았다. 아직도 지역적 특색으로 인한 사람들의 인식차이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미국인을 이해하는데 남북전쟁에 관한 배경지식은 사상이나 사고방식이 다를 수 있는 그들을 상대하는데 큰 바탕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응형
반응형

1 아편전쟁을 요약하자면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에서 영국이 인도를 통한 아편수출을 함으로써 삼각무역을 이루었고 이로인해 청나라에 아편이 퍼지면서 나라의 기강이 흔들렸다. 이에 반발한 청나라 사람들이 서구에서 장사꾼들을 하대하고 쫓아내면서 영국이 자극을 받았고 결국 아편전쟁 (1) 이어진다. 

청은 패배하였고 불합리한 조항들을 체결할 밖에 없었다. 

https://moomeobal.tistory.com/30

 

[아편전쟁,난징조약] (1) 1차 아편전쟁, 영국 청나라의 갈등

영국과 청나라가 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청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라 광저우 항만 해외무역을 위해 개방한 상태였다. 무역을하면서, 영국은 차, 도자기 등을 수입했고 영국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마..

moomeobal.tistory.com

 

 

조약의 체결로 인해 중국은 극심한 타격을 입고 있었다. 주권국으로서 위치가 날이 갈수록 하락했고 외국인들이 치외법권 등의 특혜를 누려서 기반이 흔들렸다. 관세를 통제할 있는 권리도 서구에 넘어갔기 때문에 청나라 자국의 산업구조를 보호하는 기능을 상실한 꼴이 되었다. 

 

와중에 영국은 난징조약 채결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만큼, 실제로 일이 풀리지는 않았는데 수입품목에 보수적이었던 청나라 사람들과 아편 전쟁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외국인들을 배척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영국은 이에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구실이 필요했다. 

 

이는애로호 사건으로 이어진다. 애로호 사건은 표면적으로 2 아편전쟁의 시작이라고 있다. 하지만 그대로 구실이 필요했던 영국이 트집을 찾아내서 공격을 셈이다. 

 

1857 영국은 청나라를 공격해서 2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을 했고 청나라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청나라는 2 아편전쟁 이후텐진 조약 맺게 되었다. 

텐진조약의 구체적 내용

  1.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외교사절이 베이징에 상주할 권리를 가진다.
  2. 무역을 위해 10개의 항구를 개방한다.
  3. 외국 상선의 자유로운 장강 통상을 승인한다.
  4. 이전에 금지했던 중국 외국인 여행을 허가한다.
  5. 아편무역을 합법화한다.
  6. 개항 항구를 확대한다.
  7. 기독교를 공인한다.
  8. 영국과 프랑스 나라에 대한 배상금으로  200 냥을 지불한다.
  9. 영국 상인에게 재산 손실의 위로금으로 200 냥을 지불한다.
  10. 배상금을 때까지 광둥성 보장을 점령한다.
  11. 애로호 사건의 결과로 체결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청은 처음에 조약에 반발했으나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또다시 제압당하고 러시아의 중재 아래에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다. 베이징 조약은 아편전쟁의 종결을 알린다. 그리고 텐진조약을 인정하게 만들고 아편의 거래도 합법화 시킨다. 이는 양무운동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또한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의 지점이며 중국 뿐만 아닌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다. 현재에도 “21세기의 아편전쟁등으로 아편전쟁을 이옹한 묘사를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반응형
반응형

영국과 청나라가 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청은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중이라 광저우 항만 해외무역을 위해 개방한 상태였다. 

 

무역을하면서, 영국은 , 도자기 등을 수입했고 영국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차마시는 문화가 발전하여 서민들가지도 차를 많이 소비하게 되었고, 차를 수입하는 양이 커졌다. 반면 중국은 면직물,시계,망원경 등을 수입했다. 이는 작물같은 것이 아니라서 중국이 영국으로 차를 수출하는 만큼 많지 않았다. 자연스레 영국의 무역적자로 이어졌다. 이에 영국인들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위해서 생각해낸 것이 아편무역이었다. 

 

영국은 인도(영국의 식민지)에서 아편을 만들어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법으로 삼각무역을 정립했다. 그리고 중국의 하층민에게 아편을 팔았고, 그들의 아편 소비는 엄청났다. 사실 청나라에서는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있었으나 영국은 밀수입의 방법으로 청나라에 들여왔고, 아편이 청나라에서 모든 계층으로 퍼졌다.

영국은 국가의 유출을 피했고, 청나라는 거래를 하며 은으로 결제를 했어서, 청나라의 보유량이 급감하여 은값이 폭등하고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에 청나라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웠다. 외국상인들의 아편을 붙태워버리는 등의 아편 단속을 철저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인들(마약상)들을 추방하였다. 이에 반발한 영국상인들은 이를 영국정부에 알렸고 이것이 1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다. 

 

1840, 영국은 공격을 시작했다.

 

1842, 결국 청나라는 대패하였고, 영국에 굴복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배상금 600 달러를 지불하고 홍콩 상하이 광저우 등의 항구를 개방하기로 하였다. 

조약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홍콩지역을 영국에게 내어줄 것, 5개 항구를 개방할 것, 청은 영국에 배상금을 지불할 것, 최혜국 대우" 등이 있다.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에 실렸던 아편전쟁을 묘사하는 일러스트

이는 아편 무역이 영국의 권리가 된 것과 다름 없었다. 

 

반응형
반응형

세계사를 공부하며 빼놓을 수 없는 로마!!

 

로마 제국은 서양의 중심이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양인들의 꿈의 제국이라고 묘사되는 로마는 이 전에 다른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동안 이탈리아반도를 조금씩 차지하며 성장하고있었다. 

로마는 조용히 무럭무럭 자랐다. 알렉선더 대왕도 동방원정에 갔다가 죽었고, 마케도니아도 분열되어있어서 국력을 키울 타이밍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결국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까지 정복하고 이탈리아반도를 모두 삼켜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탈리아 반도 아래 아프리카 대륙의 북부에는 "카르타고"라는 나라가 있었다. 두 땅 사이의 "시칠리아 섬"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는 충돌을 하게된다. 이것이 80년 동안 이어진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기원전 146)이다.

http://www.crystalinks.com/carthage.html

(당시 로마영토와 카르타고의 영토)

 

1차 포에니전쟁 - 로마승리

이때 로마가 승리를 하고 카르타고는 10년간 보상금을 물어주기로 한다.

 

2차 포에니전쟁 - 로마승리

1차에서 진 설움을 어릴때부터 간직했던 한니발 장군이 로마로 진군하면서 시작. (카르타고가 해군이 강해서 로마는 바다를 견제했으나 한니발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에 도착한다. 하지만 로마는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했고 한니발은 본국의 도움 요청에 어쩔수없이 로마에서 물러남)

이 일로 카르타고는 50년간 보상금과 에스파냐땅을 포함한 해외영토를 로마에게 준다...(근데 10년만에 다 갚아버림)

https://books.openedition.org/obp/2404

(한니발 장군의 이동경로)

 

3차 포에니전쟁 - 로마승리

로마는 점잔을 체를 많이 해서 구실 없이는 절대 먼저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엣가시인 카르타고를 없애버리기위해 카르타고 서쪽의 누미디아를 꼬드겨 카르타고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이로서 로마는 지중해 일대를 다 가졌고, 그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도 삼켰다. 헬레니즘 왕국이 다 로마의 영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페르시아 전쟁은 동양과 서양의 충돌이라 불린다.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부터 알아보자.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르시아를 먹고나서 주변나라를 열심히 정복해나갔다. 그리고 최초의 대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출처- http://placesbook.org/ancient-persia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제 그리스를 욕심냈다. 그리스는 이에 대비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연합군으로 맞선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vs페르시아 의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이 전쟁은 20년동안 이어진다.... 

 

1차 페르시아전쟁

그리스가 이겼다. (여기서 승전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의 병사가 달린 거리에서 마라톤이 유래했다.)

 

2차 페르시아전쟁

또 그리스가 이겼다. 

스파르타군은 전멸했고 (영화 300), 아테네가 활약을 했다. 

 

3차 페르시아전쟁

또 그리스가 이겼다. 

 

 

그리스는 전쟁에서 완승을 했지만 평화롭지 못했다. 바로 이어서 그리스 내전인 "펠레폰네소스 전쟁"(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이 발발한 것이다. 

 

 

 

근데 이 내전의 결말에는 그리스의 북쪽에서 내려온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가장 유명한 왕 알렉산드로스 3세 동방원정에 나선다. 페르시아도 정복해버리고 그는 광대한 대 제국을 건설한다. 

 

출처- https://schoolworkhelper.net/alexander-the-great-356-323-hellenistic-era/

이 동방원정으로 헬레니즘이 탄생하게되었다. 

오리엔트 문화에 그리스문화가 흩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문화가 융합되어 탄생한 것이 헬레니즘 문화. 비록 알렉선더대왕은 돌아오는 길에 병으로 죽고 말았고 죽자마자 이 대제국은 분열해버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런 방면에서 아주 의미있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